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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식

1시간 ·

 

낭만의사 vs 현실의사

박정희정권에 의대에 입학한 우리에게 이상주의 의사가 대세였다. 여유있게 진료하며 돈을 많이 버는 선배보다 죽음에 맞서 밤을 새우며 자신은 돌보지 못하는 선배가 우상이었다.

우리세대 의사들은 음악의 장조와 단조처럼 전문과를 major와 miner로 나누었다. 장조음악이 밝고 명랑한 반면 단조음악은 슬프고 어둡듯이 의대를 졸업하면 동기들이 major과에 몰렸다. 낭만닥터 김사부가 대세였다.

이후 군사정권이 저물고 민주화가 되면서 의사들도 변해갔다. 이상보다 현실적 이익과 실리를 추구하는 의사가 대세가 되었다.

그 이유는 의사를 대하는 환자들의 자세가 이전과 달라진 때문이다. 환자의 목소리가 커지며 의사를 믿고 존경하던 자세가 사라지고 환자가 의사의 태도와 기술을 평가하는 시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우리세대 의사들이 동경했던 김사부의 낭만이 지금 세대 의사들에게는 위험한 감상이 되어 의사들이 점점 현실을 인식하며 변해갔다.

인기있던 major과는 도태되고, 워라밸이 유지되며 돈벌이까지 되는 전문과가 대세가 되었다.

권력, 명예, 성공에 대한 욕망이 강한 의사가 속출하고, 환자에 대한 진정보다 자신과 병원의 순위와 영향력을 우선하는 시대가 되었다.

과거 노력하여 major과를 하였던 동기들이 세월이 흐르며 후배의 동정을 받는 의사가 되어 버렸다. 일부는 major과 전문의라는 낭만의 꼬리를 떼고 다른 진료를 선택했고, 일부는 전문과는 지키되 시간과 돈벌이에 유리한 진료에 집중하는 전문의사로 전환했다. 내가 아는 외과의사는 Whipple 수술하는 의사였는데 지금은 항문질환을 진료하는 의사로 떠올린다.

이런 변화들이 오늘날 필수의료 위기라는 문제로 이어졌다. 우리 세대의 대세였던 낭만을 깨버린 것은 이 사회의 의사를 대하는 자세였다.

불가항력의 의료결과를 돈벌이 시비로 인식하는 사회, 의사의 전문지식을 밥 한그릇도 안되는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사회, 그런 댓가를 지불하며 의사가 神이기를 요구하는 사회, 의사를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는 사회, 의료소비자를 왕이라고 인식하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의사는 현실적일 수 밖에 없었다.

정치, 사법, 행정이란 세 가지 국가 최고 권력도 의료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사회가 알아야 한다. 삼권이 아무리 막강해도 죽음 앞에서는 無用之權이다.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은 불로장생의 꿈을 이루기 위해 신하 서복에게 삼천 명의 일행을 내주며 불로초를 구하려 했지만 50살에 죽었다. 권력보다 의료가 훨씬 더 중요하다.

낭만의사가 사라지고 현실의사가 대세가 된것은 이 사회가 의료 시스템을 정치, 사법, 행정으로 일방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착각한 때문이기도 하다.

의료가 의사의 전유물은 아니지만 의료의 핵심은 의사다. 그렇다면 사회가 후진국의 전형인 "일방 통제"를 하려 하기보다 다른 선진국들처럼 "합리적 관리"를 해야 하였다.

윤석열이 의사와 협의조차 않고 일방적으로 한 해 이천명의 의사를 증원한다고 하였고 차관이 의사들과 협의할 필요가 없다 망발하면서 의료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길 바란다는건 autism이다.

이재명이 정은경을 앞세워 의료개혁을 한다는데 의료계와 협의 않고 밀어 부치면 다른 버전의 윤석열, 박민수가 된다.

의료는 국가 삼권처럼 가시적인 힘은 없으나 무형의 힘은 삼권보다 훨씬 강하다.

박정희가 만든 원가이하 수가, 전두환-노태우-김영삼이 무분별하게 늘린 의과대학, 김대중의 의약분업, 노무현의 의료법개정, 이명박 의료산업화와 DRG, 박근혜의 원격의료, 문재인의 문케어와 공공의대, 윤석열의 이천명 증원, 이재명의 공공의료사관학교와 지역의사제... 내가 의사로 있는동안 이런 무수한 정책들이 의사들과 사전 협의조차 없이 강압적으로 추진되었다.

"정치, 사법, 행정으로 두들기면 의사들이 어쩔건데?" 이것이 이들 정책이 실패한 이유다.

의사들은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항거한다. 손에 화염병이나 돌을 직접 들지 않고 정책이 요구하는 반대편으로 조용히 갈 뿐이다.

중증 응급 진료의사가 절실하다면서 오히려 그 진료에 종사하는 의사들을 정치 사법 행정으로 더 옭아 매니 의사들이 중증응급 진료를 기피한다.

공공의대를 만들고 지역의사를 만들어 온갖 옵션으로 묶어 봐야 그들도 막상 의사가 되면 지금 우리와 같아진다.

우리사회는 조급하고 생각이 짧은 사회다. 제도로 의사를 통제 할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을 가진다. 그러니 필수의료에 더 많은 제도를 덧칠을 했다. 현실의사는 제도로 덧칠 할수록 기피한다.

나는 낭만의사로 출발하여 지금은 현실의사가 되었다. 내가 충고하면 의료현안 해결에 의사를 통제하고 관리하기보다 차라리 권한을 주며 자발적으로 해결하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정치 사법 행정으로 통제할 대상은 의사가 아니라 의사들이 결정하는 해결방안을 통제하면 되는 것이다.

"빵을 두 조각으로 나누는건 의사 너희가 해! 어느쪽 빵을 선택할지는 정부가 하마." 이런 마인드가 필요하다. 필수의료 몰락을 해결할 유일한 방법이다.

현실적으로 필수의료문제의 핵심을 가장 잘아는 자들이 의사이기 때문에 의사들의 자발적인 대책 마련 외에는 대안이 없다. 의사들이 자발적으로 나서도 힘든 상황에 의사와 협의 없이 제도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건 망상이다. 말을 끌고 가도 물을 마시게 하는건 다른 차원이다.

낭만의사로의 회기는 불가하지만 현실의사라도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면 기회가 있다. 몇 푼의 돈으로 개선할수 있다 생각하는건 필패다. 헌재 문제는 돈과 제도 이전에 의료를 대하는 사회인식에 핵심이 있다.

오래전부터 만나는 기자, 공직자, 시민단체 관련자들에게 강조한 말이지만... 이런 진리를 내가 죽기 전에 이 사회가 알지 못할 것이라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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