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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news.naver.com/article/020/0003666646?sid=102

 

“실적이 안 나오면 ‘중국 조직에 팔아버린다’는 협박이 날아왔어요. 아무리 일해도 빚이 늘기만 하는 구조라서 탈출이 사실상 불가능했어요.”

‘고수익 아르바이트’라는 홍보에 낚여 캄보디아의 범죄조직에 감금됐다가 가까스로 탈출한 30대 남성 정민수(가명) 씨는 12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수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최근 대학생 박모 씨(22)가 캄보디아에서 납치·살해되는 등 한국 청년들이 현지에서 변을 당하는 사례가 잇따르는 가운데, 정 씨처럼 다수의 피해자는 ‘고수익을 보장한다’는 유혹에 휩쓸려 범죄에 휘말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개밭’에 갇혀 노예처럼 일해”

지난해 6월 동남아 여행 도중 여행 경비가 바닥난 정 씨는 ‘캄보디아에서 월 7000달러(약 1000만 원) 이상 고수익 아르바이트’가 가능하다는 텔레그램 글을 접했다. 정 씨는 지원 메시지를 보냈다. 이후 3개월간의 ‘노예 감금 생활’이 시작됐다.

안내에 따라 정 씨가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수도 프놈펜 인근의 한 도시였다. 3m가 넘는 담장 위에는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고 무장 경비원 수십 명이 순찰을 돌았다. 이곳이 캄보디아의 ‘웬치’라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웬치는 동남아 보이스피싱 조직 사이에서 쓰는 은어로 범죄 단지를 뜻한다. ‘단지’를 뜻하는 중국어 위안취(园區)에서 유래했다.

도착하자마자 여권과 휴대폰을 빼앗긴 정 씨는 ‘로맨스 스캠’ 업무에 동원됐다. 여성인 척하며 남성을 유혹해 돈을 빼냈다. 채팅과 음성·영상통화를 직접 맡거나 도왔고, 영상통화에는 딥페이크 기술까지 동원됐다.
 

조직원들은 웬치를 ‘개밭’이라고도 불렀다. ‘사람이 아니라 개처럼 일하고 맞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웬치에는 식당과 식료품점은 물론이고 카지노까지 있었지만 복지를 위한 시설은 아니었다. 콜라 한 잔이 5000원에 이를 정도로 물가가 비싸 빚만 늘어나는 구조였다.

식단은 기름기 많은 중국식 반찬뿐이었다. 3.3㎡(약 1평) 남짓한 방에 3명이 몸을 구겨 넣고 잠을 청했다. 숙식비도 모두 빚으로 계산됐다. “나가고 싶으면 나가라. 다만 개밭 비용(숙식비)을 내고 가라”는 협박이 이어졌다.

정 씨가 있던 조직 총책은 한국인이었다. 하지만 실적이 나쁘고 빚이 쌓인 피해자들은 폭력과 마약 투약 등 착취 수준이 더 심했던 중국 조직으로 넘겨졌다. 정 씨는 지난해 9월 주말 외출 기회를 틈타 탈출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여권에 나온 신상정보를 알고 있으니 한마디라도 뱉으면 찾아가 해코지하겠다”는 협박 메시지가 한동안 이어졌다.

● ‘해외 고수익 알바’ 글 넘쳐나… ‘인권은 없다’

극심한 협박과 납치, 감금은 정 씨만의 경험이 아니다. 이달 초 캄보디아 시아누크빌에 감금됐다가 더불어민주당 박찬대 의원의 도움으로 풀려난 한 남성은 “정보기술(IT) 관련 업무를 하면 월 800만∼1500만 원의 고수익을 준다. 1인 1실 호텔 숙소와 식사를 제공한다”는 구인 글을 보고 캄보디아로 향했다. 실상의 업무는 보이스피싱이었고, 업무를 거부하자 쇠파이프와 전기충격기를 동원한 구타가 이어졌다. 박 의원 측은 제보를 접하고 외교부 등에 긴급 구조 요청을 했다. 캄보디아 내 한국인 납치 신고 건수는 올해 1∼8월 330건에 달한다.

고수익 알바를 보장한다는 ‘위험한 초대’는 국내 포털 사이트 등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취재팀이 ‘해외 고수익 알바’를 검색해 한 사이트에 들어가자 수많은 구인 글이 나왔다. 한 게시글에선 “캄보디아 시아누크빌에서 일을 하면 기본급 290만 원에 인센티브를 포함하면 월평균 1000만∼2500만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 게시글 작성자와 텔레그램으로 직접 연락을 해보니, “보이스피싱 업무를 하면 되고, 한 주당 200만 원은 기본으로 벌 수 있고 열심히 일하는 만큼 돈은 더 벌 수 있다”고 밝혔다.

정 씨는 “최근 사망한 대학생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라며 “맞아 죽고, 마약 하다 죽는 사람이 상상 이상으로 많다. 웬치 안에 인권은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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