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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이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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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의 여포는 배신의 대명사로 통한다. 아버지라고 불렀던 정원과 동탁을 죽였고, 갈 곳이 없을 때 도와준 유비의 뒤통수를 쳤다.

하지만 따져보면 여포는 배신을 많이 한 것만큼 스스로도 자주 배신당했다.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도 배신한 측근들이었다.

흔히들 사람은 ‘잘해 주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사람의 심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누가 나에게 잘해 주면 처음엔 고맙지만, 갈수록 부담과 열등감이 커진다. 결국 나중에는 거리를 두거나 스스로 기억을 왜곡하게 된다. 아마도 여포에게 두 ‘아버지’는 자기 덕분에 과분한 자리에 오른 멍청이에 불과했을 것이다.

의외로 우리의 마음이 기우는 건 ‘내가 잘해 준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왠지 모를 묘한 우월감, 그리고 내가 베푼 만큼 돌려받아야 한다는 보상 심리 때문이다. 정작 상대방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데, 나 혼자서 대단한 은혜를 베푼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허다하다(여기서 ‘돌려받길 바란다’는 건 고마워하고, 미안해하고, 존경해 주길 바라는 등의 감정적 보상을 포함한 뜻이다).

동탁이 죽은 뒤, 원소는 방황하던 여포를 용병으로 거두었다. 얼마 안 있어 벌어진 장연과의 전투에서 여포는 선두에서 싸워 공을 세운다.

여기까진 좋았다. 하지만 여포는 ‘원소가 이긴 건 다 내 덕분’이라며 거만하게 굴었다. 심지어 ‘원소의 가족을 죽인 동탁을 내가 죽였으니 나는 원소의 은인’이라고 떠들고 다녔다고 한다.

원소 입장에선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원씨 집안이 도륙당했을 때 여포는 동탁의 오른팔이었다. 장연과의 전투도 여포가 활약한 건 맞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지휘관인 원소였다. 결국 원소가 암살단을 보내는 것으로 둘의 관계는 파탄이 났다.

여포가 유비를 배신한 사건도 인상적이다. 유비는 조조에게 져서 방황하던 여포에게 머물 곳을 빌려주었다. 하지만 여포는 남의 집에 빌붙어 지내게 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내가 아니었다면 조조가 진작에 서주를 점령했을 것’이라며 유비의 선의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결국 여포는 유비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서주를 빼앗았다.

이처럼 번번이 은혜를 배신으로 되갚은 여포였지만, 정작 자기가 은혜를 베푼(또는 베풀었다고 착각한) 사람들에겐 눈에 콩깍지라도 씌운 것처럼 굴었다. 마지막에 여포는 친척이었던 ‘후선’과 항상 옆에 끼고 돌았던 ‘진등’의 배신으로 망했다. 언제나 배신자는 내가 잘해 줬다고 생각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온다. 브루투스, 너마저!

진궁의 경고를 귀담아들었다면 결말이 달랐을까? 원래 둘은 상하 관계라기보다는 동업자에 가까웠다. 떠돌던 여포를 데려와 군권을 맡긴 게 둘 인연의 시작이었다. 여포는 항상 꼬장꼬장하게 굴며 과거의 부채를 떠올리게 만드는 진궁을 불편하게 여겼다.

여포의 어리석음을 그저 남의 일로 치부해선 안 된다. 남의 호의는 별것 아니고, 내가 베푼 호의는 대단하다고 착각하는 게 인간의 본능이다. 따라서 남에게 베풀 때엔 애초에 보답을 기대해선 안 된다. 이 세상에 채권자를 좋아하는 채무자는 없기 때문이다.

동탁은 여포에게 죽을 때 ‘네가 어떻게 나를 배신할 수 있냐’며 원망했다고 전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말 속에 그가 여포에게 죽은 이유가 담겨 있다. 동탁은 여포에게 자기가 베푼 ‘은혜’를 강조하며 이자까지 붙여 갚을 것을 독촉했을 것이다. 부채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면 채무자는 돌발 행동을 하게 돼 있다. 동탁의 시녀를 건드린 사건은 그저 트리거가 되었을 뿐이다..

여포 역시 죽을 때 동탁과 똑같이 굴었다. 배신한 부하들에게 ‘내가 그렇게 잘해 줬는데 너희들이 어떻게 날 배신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스스로의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여포가 남긴 말들을 보면, 그는 인간이란 ‘잘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해 주는 사람’에게 끌린다는 걸 몰랐던 것 같다. 이성을 사귈 때 선물 공세가 답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당신의 선의를 사채 담보처럼 함부로 굴리지 말기 바란다. 모든 투자가 그렇듯 선의 역시 높은 수익을 내려면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한다. 당신이 성급하게 굴면 ‘고마운 사람’에서 ‘부담스러운 사람’, 나아가 ‘미운 사람’이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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