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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news.naver.com/article/053/0000046829?sid=102

 

1997년 11월 1일 오전 고영복 교수(전 서울대 사회학과)는 모르는 사람한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지금 위급상황이니 급히 북경으로 출국하여 북한 대사관으로 들어가라"라는 급한 목소리였다. 고영복은 자신이 며칠 전에 만났던 북한 공작원이 지령한 메모지와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 초안을 찢어 휴지통에 버리고 도주하려다 안기부(현 국정원) 대공수사관에게 체포되었다. 고영복의 정체는 1997년 10월 27일 검거된 최정남·강연정 부부간첩(본지 2823호, '음독까지 감행한 울산부부간첩' 참조)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서울대 교수가 36년간 암약해온 고정간첩이라는 놀라운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남북회담 남한 측 대표로 참석

고영복은 1928년 경남 함양읍에서 출생하여 1953년 서울대 사회학과, 1956년 서울대 대학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강사와 이화여대 조교수를 거쳐 1966년부터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1993년 정년퇴직을 한 그는 사회학개론 등 22권의 저서를 발간했으며 100여편의 논문을 발표할 정도로 한국 사회학계의 거두로 평가받았다. 1973년 서울대 교수 재직 때는 남북적십자회담 자문위원으로 두 차례나 평양에서 열린 회담에 남한 측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북한의 포섭간첩이 남북회담에서 남한 측 대표단으로 참가했으니 그 회담이 북한에 이끌려 갈 수밖에 없었다.

1981년에는 헌법기관인 평통(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회) 정책자문위원을 맡기도 했고, 1990년에는 서울 봉천동에 사회문화연구소를 설립하여 소장으로 활동해왔다. 1993년 2월 서울대를 퇴직한 후에는 명예교수로 위촉되었고 국민훈장까지 수여받았다. 1994년 7월에는 차관급 직책인 문화체육부 산하 한국문화정책개발연구원 원장으로 임명받아 활동하였다. 간첩이 훈장을 받고 차관급 직책에까지 올랐던 것이다. 북한의 대남공작 역량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었다.

6·25 때 의용군에 자진 입대

고영복은 서울대 재학 시절 6·25 남침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9월 북한 의용군(義勇軍)에 자진 입대했다. 그의 작은아버지 고정욱도 서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 6·25가 발발하자 부인과 함께 자진 월북하여 김일성대학 교수로 재직한 바 있다. 고영복은 대한민국을 배반하고 북한군의 일원이 되어 우리에게 총부리를 들이대며 전투하다 1950년 11월 북한군 후퇴 때 생포되었다. 이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는데 1953년 6월 반공포로 석방 때 풀려났다.

고영복은 1961〜1989년까지 북한 공작원과 6차례 접선했다. 1차 접선은 1961년 9월 이화여대 강사로 재직할 때였다. 시작은 한 통의 전화였다. 고영복은 전화를 걸어온 미상의 남자와 학교 근처 다방에서 만났다. 이 남자는 고영복에게 '6·25 때 월북해서 북한에 사는 작은아버지와 친구 장내윤의 소개로 왔다'며 장내윤 편지를 건네줬다. 그가 북한 공작원임을 확인한 고영복은 그와 3회에 걸쳐 만나며 미화 1000달러와 통신방법을 교양(교육)받고 난수표 등 통신문건 및 '공수산'이라는 공작대호를 받았다. 또한 '서울대를 중심으로 진보적 청년학생(좌익학생)들 속에 조직사업을 전개하라'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2차 접선은 1966년 7월에 이뤄졌다. 당시 고영복은 북한에서 남파된 노영복이라는 여자 공작원과 접선하고 자기 집 근처에 있는 하숙집을 소개해주었다. 1차 접선 때 받은 난수표를 잃어버려 보고할 수 없었다고 그간의 사정을 말하고 새로운 난수표를 수령하였다. 여자공작원의 부탁으로 제주에 내려가 우체국에서 "무사히 도착하였다"는 전보를 발송해 북한에 안착(安着) 보고를 대행해 주기도 했다. 그녀가 9월까지 체류하는 동안 수차례 접촉하며 공작활동에 대해 지시를 받았다.

1973년 평양에서 3차·4차 접선

고영복은 적십자사 자문위원 자격으로 1973년 3월 20〜23일 평양에서 개최된 제5차 남북적십자회담 때 남한 대표단의 일원으로 방북하였다. 이때 북한 측 자문위원으로 고영복을 안내한 강상수(실제는 통일전선부 공작원)한테 작은아버지를 만나보라고 제의를 받았으나 "보는 눈이 많으니 공식적 행사만 하겠다"고 거절하고 후일을 기약하였다.

1973년 7월 10〜13일 평양에서 개최된 제7차 남북적십자회담 때 다시 남한 대표단의 일원으로 방북한 고영복은 북한 측 자문위원 강상수와 접선하였다. 그는 "이번 회담에서 남측에서 중대 제의를 한다는데 그 내용을 무엇인지 알려달라"는 쪽지를 건네받고 '이산가족 확인 및 상봉 제의' 등 회담 정보를 사전에 쪽지로 강상수에게 전달하였다. 우리 측 회담전략을 북측에 제보한 것이다.

5차 접선은 1975년 7월 서울대 문리대 캠퍼스에서 이뤄졌다. 당시 고영복은 자신의 연구실로 찾아온 45세 정도의 남자와 만났다. 그는 고영복에게 "나는 재일교포인데 북에 계시는 작은아버지가 보내서 왔다"며 그의 안부를 전했다. 그가 북에 와서 김일성 원수를 만나라며 입북 권유를 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때가 아니라며 완곡히 거절하며 돌려보냈다.

6차 접선은 1989년 6월 서울대 연구실로 남파공작원 김낙효가 찾아오면서 이뤄졌다. 김낙효가 '작은아버지가 보내서 왔다'고 하자 고영복은 그의 신분을 확인한 후 서울대 후문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대접하며 국내 정세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이후 5차례나 김낙효를 더 만났다. 한번은 자신의 승용차로 경기도 의왕시 소재 백운저수지 근처 매운탕집에서 점심을 대접하며 정년퇴임 후 계획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는데, 김낙효는 퇴임 후 연구소를 설립하면 일본을 통해 운영자금을 대겠다고 밝혔다.(실제 1990년 고영복은 사회문화연구소를 설립했다.) 또한 특정 학생운동권 출신자와 재야 활동가를 거론하며 소개시켜 달라고 하자 학생운동권 간부나 재야인사는 소개가 어렵고 서울대 사회학과 김모 교수는 만나서 이야기 해보겠다고 약속했다.

고영복은 김낙효가 은신처를 부탁하자 서울 충정로 근처 '십자 기원' 내 작은방에서 1989년 10월까지 2개월가량 기거하도록 주선해주었다. 김낙효는 고영복에게 '제자 중 북에 가고 싶은 자가 있으면 같이 입북하라'고 제의를 했으나 고영복은 '당장 북에 가기 어렵다'고 난색을 표하고 후일을 도모했다. 고영복은 1989년 10월 김낙효와 함께 드보크(Dvoke·공작장비 비밀 매설지) 장소를 물색하러 다니다 시흥시 월곶동 배나루터 근처 전신주를 드보크로 약정했다. 이와 함께 구체적인 해외 비상연락 및 도피방법을 교양받았다. 특히 차후 접선할 공작원과 접선 시 신분확인용 인식표(구리로 된 메달 반쪽 목걸이·사진 참조)를 받아 자신의 차 트렁크 공구박스에 은닉하였다.
 

최정남이 고영복 접촉 시 공작원 신분을 증명한 인식목걸이.

최정남이 고영복 접촉 시 공작원 신분을 증명한 인식목걸이.

북한 공작원 김낙효는 당시 북한 사회문화부 소속 공작과장인 윤택림의 가명으로 5차례나 남파 경험이 있는 베테랑이었다. 1989년 남파 때 고영복뿐만 아니라 주사파의 대부라 불리는 김영환을 접선, 포섭하여 월북시키고 민족민주혁명당을 창당케 하는 공을 세운 거물급 공작원이다.(본지 제2807호 '북한이 환호한 주사파 간첩단의 탄생, 민족민주혁명당 사건' 참조)

1997년 부부간첩과 7차 접선

고영복은 1997년 9월 10일 오전 사회문화연구소 사무실에 대학 제자라고 밝힌 자가 찾아오겠다는 전화를 받고 당일 오전 11시경 2명의 남녀를 만났다. 이들은 고영복에게 "저는 북에서 온 김정철(남파간첩 최정남의 위장명)입니다. 북에서 민주조선 기자로 있는 고석희(고영복의 사촌동생)가 안부 전하라고 했습니다"라고 말했고 고영복은 이들의 신분 확인을 원했다. 부부간첩은 1989년 남파공작원 김낙효가 준 인식표(반쪽메달 목걸이)를 제시하면서 신분을 확인했다.

당시 간첩 최정남은 고영복이 조국통일(적화통일)에 기여한 공로로 '공화국 창건 기념 매달'과 '조국통일상'을 수여했음을 통보했다. 또한 옥수수 박사로 알려진 서울대 김모 교수를 소개시켜주고 '수원 19·20·21호' 품종을 구해달라고 지시하였다. 이들은 추석을 지낸 후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이후 그해 9월 24일과 10월 15일, 10월 16일, 10월 22일 연이어 최정남을 접촉했는데 최정남은 대선 관련 남한정세, 향후 대북정책 전망, 학생운동 전망 등에 대한 분석 보고서를 제출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주제가 너무 방대하여 11월 5일까지 제출하겠다고 약속했으나 10월 27일 부부간첩이 검거되면서 무산되었다.

보수우익 저명 교수로 위장

북한 대남공작부서 사회문화부(현 문화교류국, 구 연락부)는 부부간첩을 남파시키기 전에 사전 공작계획 단계에서부터 대호 '공수산'의 공작추진 상황을 점검하고 면밀하게 공작과업을 수립했다. 사실 고영복은 최고의 엘리트 간첩으로 무려 36년간 암약했으니 북한 입장에서는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1989년 사회문화부 공작과장인 윤택림이 직접 남파되어 고영복을 사실상 검열한 후 확신을 얻어 심층 공작으로 확대하려는 단계에서 엉뚱하게 부부간첩이 검거되면서 그의 실체가 밝혀진 것이다.

평소 보수우익 성향의 기사를 언론매체에 기고하거나 학술논문을 발표해온 고영복 서울대 교수를 북한 간첩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 예로 그는 1997년 5월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주최 세미나에서 발표를 통해 "국가안보가 좌익세력들에 의해 위기를 맞고 있다"며 이번 대선 시 보수우익 인사가 선출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이를 위하여 보수우익세력이 단결해야 한다고 설파하기도 했다. 이런 인사가 36년간 암약한 북한 공작원이었고 남북회담 때 남한대표단의 일원이었으며 차관급 직위에까지 오른 사실은 우리 사회가 간첩들에게 매우 취약한 체제임을 확인해준다.

고영복은 국가보안법상 간첩방조, 기밀누설, 회합통신 등으로 구속·기소되었다. 1심에서 기밀누설 혐의가 무죄를 받아 징역 7년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간첩방조 혐의까지 무죄가 되어 징역 2년으로 감형되었고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1년3개월 복역하다가 1999년 2월 김대중 정부에 의해 형집행 정지로 석방되었다. 36년 암약한 간첩이 간첩죄 적용도 안 받고 회합통신죄만 인정받아 징역 2년이 확정되었으나 그마저 김대중 정부 들어서 석방되는 현실은 대한민국이 간첩들에게 너무 관대한 사법체제임을 알 수 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대한민국의 간첩 법제는 전 세계에서 간첩들이 가장 활동하기 편한 법제이다. 당장 개정되어야 할 것이다.(본지 제2751호 '간첩을 간첩으로 부르지 못한다' 참조) 고영복은 석방 이후 자신이 설립한 사회문화연구소에서 활동하다가 암투병 중이던 2011년 2월 24일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올 1월부터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이 폐지되고 경찰이 대공수사를 전담하는 상황에서 한 해가 다가도록 현재까지 간첩을 한 명도 검거하지 못하고 있다. 이전에는 좌파 정부 때도 매년 1〜2명은 검거했던 사례에 비추어 보면 전임 문재인 정권과 북한의 '대공수사력 무력화' 술책이 안타깝게도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 상황에서 정부와 정치권은 치졸한 권력투쟁에 매진하기 전에 국가안보를 위해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조속히 부활시켜 국정원, 경찰, 방첩사령부가 서로 경쟁, 협조하면서 정교한 안보파괴범인 고영복 같은 간첩들을 색출해야만 대한민국의 헌법체제가 유지될 것임을 지적한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 원장 yoodr11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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